시네마 천국 - 단편

시네마 천국 - 단편

들어와 0 381

시네마 천국 



시네마 천국-시네마 천국- 












‘붓들 다 빨아놨냐?’ 












싸부는 오늘도 술이 거하게 취하여 옥상의 작업실로 들어선다. 젊은 나이에 어찌 그렇게 술만 쳐먹고 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싸부, 내일 월급날 인데…..’ 












나는 고향에 부쳐야 될 돈들로 인해 기어이 돈 얘기를 하고 말았다. 












‘알았다니깐…..’ 












일류도 아니고, 2류극장의 간판쟁이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배울 것이 못 된다고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싸부는 술이 취했을 망정, 붓을 들고, 간판 앞에 서면, 정신 없이 칠을 해댔다. 나는 미술을 전공한 적도 없고, 싸부처럼 감각도 없는, 그저 간판쟁이 보조이지만 나는 틈틈히 그림을 그려 보면서 싸부의 그 천재적인 감각을 조금이라도 따라 볼 요량으로 애써 보기는 했다. 어릴적 국도,국제, 허리우드, 피카디리, 단성사, 스카라 등등 내노라 하는 일류 극장들은 그 간판에서 비추어지는 그 웅장한 스케일과 도드라지는 색감, 배우들의 절절한 표정들이 영화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그려 놓아, 이제는 이 바닥에서 굴러 먹고는 있었지만 그 당시의 느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불어 닥친 소극장 체제의 여파로 대형극장 들도 시설들을 개축해서 외국처럼 떼사리로 다른 영화들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상영하기도 하는가 하면, 각기 다른 시간대에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짬뽕방식을 쓰는 곳도 생겨 놔서 극장주 측에서는 점점 간판을 구지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빗발치고 있기도 했다. 거기다 사람들의 입맛도 바뀌어 극장 간판이 너무 크면 촌시럽다고 까지 하는 신세대 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극장도 간판의 위력에 대해서 이제는 반신반의 하는 실정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이제는 너무 퇴락해버린 극장 간판. 예전에는 어느 극장이 잘 그린다고 하는 소문이 돌면 스카우트 열풍까지 불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질 않는다. 게다가 사진 현수막을 대형으로 제작하는 업자들이 페인트보다 선명하고 확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간판보다 더 크게, 극장 밖에 이벤트 광고를 위해 걸릴 때에는 정말 심사가 좇 같았다. 그럴 때면 그 현수막을 올려다 보면서 싸부는 술 취한 목소리로, 












‘그래, 사진이 낫지, 아무려면 손보다야….’ 












하면서 터덜터덜 작업실로 걸어 올라갔다. 싸부는 나에게 간판 그리는 일은 별거 아니라 면서 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는 극장의 간판을 교체하는 용역업체에서 일을 했었는데, 사람들이 다 자는 한 밤중에, 내일 상영 될 영화의 간판을 올리며,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처음 그 장면을 본다는 생각에 그만 감격한 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나는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간판을 그려서, 내 마음 속의 장면을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고 제일 먼저, 그것도 혼자서 감상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 그렇게 알려 줘도 모르겠냐? 돌대가리도 유분수지….’ 












맨 처음, 굴러 다니는 판때기에 간판화의 기초를 설명하다 말고 싸부가 나에게 그림 붓을 들린 후에 기초를 그리도록 시킨 것이 더 큰 실수이기는 했다. 미술에 미짜도 모르는 나에게 아무리 미적 감각이 아닌, 기술로만 그린다는 간판화 였지만, 기초가 없는 나로서는 처음 그린 신성일씨의 얼굴을 트위스트 김을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싸부는 내 손을 가르켜 쓸모없는 닭발 이라고 불렀다. 닭발이 어때서? 얼마나 꼬들꼬들하고 매콤한 게 맛이 있는데? 












‘닭발, 잘 들어! 간판화의 생명은, 첫째로, 포스터 보다 낫게 그려야 한다는 점이야. 포스터로 보니 그게 그거 였는데, 간판으로 옮겨진 걸 보니 영화 볼 맛 난다는 소리 정도는 들어야 한다, 이 말씀이야.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고 기술자야, 기술자, 알겠어? 멀리서 보더라도 저건 누구야 라고 튀어 나올 수 있도록 예술적인 시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을 안고 사는 쌩 기술자 말이야, 알았어? 혹여 간판쟁이 하는 주제에, 예술 합네 하고, 빵떡모자 쓰고 다니는 새끼들, 나는 정말 좇나 재수 없다고 봐. 세번째로 중요한 것은 있는 색깔로만 그려도 모든 색이 다 나와 줘야 돼! 너 저기 널려진 페인트 통 보이지? 우린 없는 색깔을 사다 쓸 수 없어. 만들든가 비슷하게 될 때까지 대가리를 굴려야 한다 이거야!’ 












말로는 정말, 기술로 그리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싸부가 간판을 그릴 때, 내게 가르치는 방법을 따르는 적은 절대 없었다. 나는 포스터에다 대고 간판의 수치와의 확대 비율을 감안해서 이리저리 기준선을 수도 없이 그어 놓고, 습작으로 나마 그려 보아도 언제나 무늬만 배우나 혹은 짝퉁이 그려져 버리곤 했다. 외국 배우들은 눈가의 그늘이 깊고, 콧선이 날카로와, 조금만 텃취를 주어도 얼추 모습을 따라갔지만, 밋밋한 한국 배우들의 미간에다, 눈동자와 입술, 분위기 등으로 느낌을 띄워 보려는 나의 시도는, 번번히 사고를 쳐서, 가까이 볼 때는 괜찮은 듯 싶어도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눈깔이 귀 옆에 붙어 있다거나 온통 얼굴에 개기름이 번질거리게 색깔을 때리는 경우가 수태였다. 그럴 때면, 싸부는 아무 말 없이 백색 페인트를 롤러에 묻혀 내 작품에 벅벅 문지르고는 밖으로 나가버려, 나를 더더욱 주눅 들게 했고…그러다 보니 내 몫은 언제나 덧칠 이었다. 중요한 음영부위, 예를 들자면 인기 여배우의 가녀린 목선과 뺨 같은 부위는 절대 손을 못 대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타이틀이나 배우 이름의 테두리선, 음영을 넣기 전, 열나 발라서 채워야 하는 머리카락 바탕색, 혹은 살결의 바닥 채화 같은 일만 맡겨졌다. 이건 기술자도 좇도 아닌 페인트공 보다 못한 단순작업의 연속이었기에, 중간중간에 나는 그런 불만을 싸부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싸부, 어떻게 하면 잘 그릴 수 있죠?’ 












‘꺼-윽, 어 취한다. 잘 그려? 사진보다 잘 그릴 수야 없지. 그냥 그리는 거야. 나 봐! 이렇게 술이 곤드레가 되도 잘 그려대잖아?’ 












그건 그랬다. 게다가 요즈음 뜨는 그 여배우의 영화가 들어오면 싸부는 평소보다 더 술이 취해서 붓을 잡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실물보다 빼어나게 그리는 것을 보고서 그냥 그린다는 말에 반기를 달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싸부는 내가 전체적인 것을 감당할 날이 올 것처럼 끊임없이 간판화의 기법을 가르쳤다. 












‘닭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우선 영사실에 가서 포스터를 받아다가 한 이틀, 아무것도 하질 말고 그 포스터 속의 배우가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해 질 때까지 열심히, 뚫어지게 바라 보는거야. 그냥 보지만 말고, 그 특징을 머리에 잘 새겨 놓으라 이 말이지. 포스터의 구도와 비슷하지만 간판의 크기에 맞추어 비율작업을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한 다음에 대강의 윤곽선을 잡은 다음에는…..’ 












‘다음 에는요?’ 












싸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얘기를 한다. 












‘상영 전, 대한 뉴우스 다음에 틀어주는 예고편을 장씨 아저씨에게 틀어 달라고 해서 극장에 아무도 없는 한 밤중에 니가 만족할 때 까지 돌려 보는 거야.’ 












싸부는 그랬다. 특히나 그 여배우의 간판화를 그릴 때에는 밤이 새도록 자기가 직접 영사기를 조작해가며, 아무도 없는 을씨년 스런 극장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밤이 새도록 예고편을 돌려 봤다. 












‘예고편은 왜요?’ 












‘예고편은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게 하려고 만든 거 아니냐? 그 말은 우리가 그리는 간판과 다름없는 요소가 담겨 있다는 거지. 영화 내용의 액기스 만을 건져서 추려냈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지. 닭발, 너같이 기초가 없는 녀석은 더더욱 이나 그 예고편을 눈깔이 꿰지도록 봐도 모자란다 이 말이야, 그 예고편을 한 장의 사진처럼 압축해 놓은 것이 우리가 그리는 간판이야. 내 말 이해가 가냐?’ 












그러나, 싸부는 그 과정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처럼 뽄을 뜬다든가 비율확대 작업을 위해 포스터에다 대고 기준선을 새까맣게 왠통 그려 댄다든가, 간판의 밑바탕 윤곽선을 시도 때도 없이 지우는 일은 절대 하질 않았다. 언제나 붓을 들기만 하면, 술이 취했거나 말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앉는 법도 없이 마무리를 해버리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군데군데 안 그린 곳이 있어 지적을 하려다가 보면 그것은 내가 해야 될 땜빵 부분들 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기초도 안 그려 놓고서 내가 칠할 부분만 남겨놓고 귀신 같이 칠을 하는 것인지…그러던 어느 날, 싸부가 술을 먹으러 밖으로 잠시 외출한 사이, 사장님의 호출이 왔다. 나는 손에 묻은 페인트도 지우지도 못하고 사장실로 달려갔다. 












‘윤 화백은 어디 가고?’ 












나이 드신 백발의 사장님은 언제나 젊은 싸부를 윤 화백 이라고 부르셨다. 나에게는 예술소리 꺼내지도 말라고 해놓고서 다른 사람들로 부터는 언제나 화백소리를 듣고 있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 외출 하셨는데요.’ 












‘그래? 지금부터라도 당장 정리에 들어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 하지?’ 












‘사장님, 말씀 하십시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응, 그게,…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 이겠네만, 극장이 팔렸어. 한동안 새 사장이 인수해서 일류 급으로 개보수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올라가 있는 영화까지만 상영하고, 간판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간판을 내리다뇨?’ 












‘자네나 윤 화백 에게는 안 된 얘기지만 새로 인수한 사장은 간판 대신에 외주업체를 통해 내부 장식과 POP, 전광판 등으로 현재의 수작업 간판을 대체한다고 통보를 해 와서 말이야…..유행이 뭔지, 내 참! 아무튼 연락 닿는 대로, 윤 화백 좀 보자고 해, 알았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괜히 이 바닥에 발은 들여 놔 가지구설랑…나는 마음이 급했다. 어서 빨리 싸부를 찾아서 이 비보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아마도 싸부는 그 해장국 집에 들어가 앉아서, 대낮부터 깡소주를 퍼 재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싸부! 싸부! 지금 큰일 났는데, 이렇게 길거리에 죽 때리고 앉아있으면 어떻 해요?’ 












싸부는 그 해장국집 앞에 널부러져 있었고, 손에는 빈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일으키자, 술 취한 김에도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면서, 












‘야이, 씨발, 돈 갖다 주면, 꺼-윽, 될 거아냐? 꺼윽….’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 재끼고 게다가 외상으로 내리 쳐 먹드니, 그예,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쫓김을 당했는가 보다. 나라도 그럴 것인데…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싸부를 들쳐업고 옥상의 작업실에 뉘여 놓고 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얼마 되지 않는 돈 이었지만, 시골에 내려 보내는 그 돈으로 부모님은 서울에서 고생하는 아들 내미에게 언제나 고마워 하셨는데, 이제는 그 길도 막혔으니, 내 참!…술이 떡이 되어서 야전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 걸걸한 가래기침을 끊임없이 해대면서 아무대나 침을 막 뱉아댄다. 간판 작업을 하다 보면 페인트와 기름의 냄새 때문에 취하기가 일 쑤 였고, 그 취한 기운이 가실 때면 가래가 끓어 오르면서 기침이 쏟아지곤 해서 나는 자주 밖으로 나가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돌리곤 했었다. 그러나, 싸부는 그 독한 기름과 페인트 냄새가 가득찬 작업실 내에서 숨도 갑갑하지 않은지,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싸부는 정신을 차렸다. 












‘아이구, 머리야, 골 깨지네, 닭발, 냉수 좀 한 사발 떠 와라.’ 












‘제발 술 좀 고만 드세요. 냉수 자시고 속이나 차리시던지… 어서 사장님께나 가 보세요. 극장이 팔렸대요.’ 












‘….알고 있어…..’ 












‘알고 계세요?’ 












야전침대에 걸터 앉아 싸부는 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걱정 마라, 먹고 살길이야 없겠냐? 그래도 극장 재개봉 하고서 첫번째 간판은 내가 올리기로 했으니….’ 












‘어떻게 간판을 올려요? 전면적으로 개보수를 한다는데 어떻게?’ 












‘닭발,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말이 많아! 실내 보수만 해도 시간에 맞추기 빠듯한데 어떻게 간판까지 신경 쓰겄냐? 일단 열고 보는 거지. 내가 그래서 마지막인 셈치고 그 신관 개봉작은 우리가 그린 간판을 올리기로 했다니깐!’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그럴 것 같았다. 간판 뒤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고, 간판을 내리고 간판을 지지하는 철골 구조물을 제거 하는 데에는 별다른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고,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싸부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마지막 간판에 대한 부분을 그 자와 약정을 한 것 같았다. 그 취한 몸에도 싸부는 붓을 챙겼다. 












‘마지막인데, 닭발, 니가 초도 좀 잡아볼래.’ 












나는 코너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면서도 감개무량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어느 새 초도에, 그것도 내가 첫 손을 지를 수 있다니! 나는 영사실로 뛰어 내려갔다. 












‘장씨 아저씨!’ 












‘닭발이 왠 일이냐? 윤 화백이 뭐 시키디?’ 












‘네. 신관 개봉영화가 뭐에요? 포스터 좀 가지러 왔는데, 스틸 사진이랑요. 이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그린다니깐요.’ 












‘그래? 용 됐네! 잘 될까 몰러, 그런데, 신관 개봉 때까지 간판 쓸어낼 거라고 하던데, 윤화백은 알고 있냐?’ 












‘……네. 뭐 잘 되겠죠? 죽으란 법이야 있을 라구요? 신관 개봉 때, 분위기 좋으면 혹시 모르죠, 옛날 분위기 끌고 간다고 그대로 못 박아 둘지, 누가 알겠어요?’ 












나는 초도만 잡는 것에도 이렇게 뻥을 치면서 내가 다 그리게 될 양, 장씨 아저씨에게 까지 허세를 부렸다. 옥상의 작업실로 올라가보니 싸부가 없었다. 또 어디 간거야? 사장님께 갔나? 나는 싸부가 누워 있던 야전 침대에 털푸덕 누워서, 갖고 온 영화 포스터를 훑어 보았다. 코믹하지만 애틋한 멜로물 로서, 그릴 때마다 내게는 손도 못 닿게 하던 그 유명한 여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이었다. 얼마전, 초특급 영화제작 프로덕션의 사장과 화촉을 밝혀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 그 여배우는 시셋말로 깨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말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배우였다. 일류 극장으로 탈바꿈 하면서 처음 영화로 내걸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내친 김에 내가 다 그려 봐? 나는 자신이 있었다. 언제나 싸부의 원성을 들어 오면서 주눅이 들었었지만 나 나름대로 틈틈히 익혀 온 솜씨가 제법 싸부의 합격 수준을 맞출 만큼은 되어가고 있었기에…나는 포스터와 스틸 사진을 찬찬히 살펴 보면서 어떤 구도로 나갈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는 일어서서 초도를 그리다, 피곤한 생각에 그 야전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얼추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선득한 느낌에 일어나 보니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고, 장마를 앞두었다고는 하지만 선선한 것이 한기까지 느끼게 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잤다 싶은 생각에 일어나서 작업실을 나섰다. 옥상의 턱에 기대니 밤바람이 더 거시게 불어 온다. 늦은 시간, 아마도 마지막 회를 상영하는가 보다. 물끄러미 아래를 내다보고 있는데, 저 멀리에 하얀색 고급 승용차가 서고, 싸부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승용차는 쏜살같이 그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싸부는 그 특유의 비척대는 걸음으로 극장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승용차가 오기 전부터 골목길에 주차 되어 있던 검은 색 찝차에서 여 남은 명의 남자들이 손에는 각구목 같은 것을 들고 튀어 내려 싸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겠구나라는 심정이 들었다. 












‘싸부! 위험해요!’ 












나는 소리를 냅다 지른 뒤에, 정신없이 극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입구를 밀치고 싸부가 있는 쪽을 바라다 보니, 벌써 그 놈들은 차와 함께 바람같이 내빼고 있었다. 싸부는 바닥에 엎드려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몸을 덜덜 떨고 있었고, 머리통은 온통 피범벅 이었다. 팔이며, 어디고 성한 곳 없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각구목이 아니라 쇠파이프로 정신 없이 두들겨 맞은 듯 싶었다.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나 많은 놈들에게 반항 한번, 못 해보고…팔을 들려고 하니 그때서야 끊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악다구니를 치길래, 내려 놓고 살펴 보니, 두 팔목이 모두 부러져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뒷정리를 하던 매표소의 미스 신이 뛰어나와, 나와 같이 싸부를 부축해서 작업실까지 겨우 올라갔다. 야전 침대에 눕히고 내가 전화를 걸려 하자, 싸부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으으…전화 내려 놔라…으으으, 전화 내려 놓으라니깐!’ 












‘윤 화백님 어쩌려고 가셨어요? 거기 가시면 그렇게 될 쭐 뻔히 아시면서….’ 












미스 신이 울먹이면서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어디를 갔다 오셨는대요?, 누나는 뭘 좀 알고 있어요?’ 












‘제가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평소에 미스 신이 싸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래도 싸부를 저 지경으로 놔 둘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가 영사실로 내려가 전화를 걸었다. 곧 이어 응급차가 도착하고, 나와 미스 신, 싸부 이렇게 셋이서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 이었다.응급차에 실리기 전에 싸부는 나에게 간판 작업을 하다가 낙상했다고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6호차, 낙상 환자를 급히 이송 중이다. 전신 골절로 보이며, 비강 출혈이 지혈되지 않고 있다. 아직 의식은 있으나, 호흡이 불규칙하고 바이탈 싸인이 기준치 이하로 급히 떨어지고 있다. 응급실 대기요망, 이상….’ 












연신 코피를 펑펑 쏟고 있는 싸부가 나에게 주머니를 가리키고… 나는 주머니 안에서 싸부의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돈도 한푼도 없는 낡은 지갑이 하나 나왔다. 이게 무어냐고 물어 보려는데 싸부가 정신을 잃었다. 다급해진 요원이 CPR(비상시 인공호흡법)을 하고, 차안이 복잡해지는 와중에 응급실에 도착하고, 싸부는 이동침대에 실려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다. 나는 지갑을 든 채로, 미스 신과 응급실의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40여분 정도가 지나고, 담당의로 보이는 의사가 걸어 나왔다. 












‘보호자가 누구시죠?’ 












‘접니다만…’ 












‘미안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방금 전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네? 뭐라구요? 잘 못 말씀하신거 아닙니까? 사망 이라뇨? 아까 까지 응급차 타고 올 때까지도 의식이 있었단 말입니다.!’ 












옆에서 울고 있던 미스 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세상이 하얗게 보이고 있었다. 죽다니! 아직까지 내 주위의 사람이 죽어 넘어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사람 목숨은 그렇게도 허망하게 지워져 버렸다. 연고자도 없이 싸부를 화장을 시켰고, 사고사로 처리된 고로 별다른 경찰의 조사도 없이 싸부의 장례는 그렇게 속전속결로 치뤄 졌다. 산마루 턱에 싸부의 뼈를 뿌리고 돌아오는 날, 나는 작업실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온통 싸부의 채취가 묻어있는 그곳이 끔찍했기에….그러나, 극장 밑에서 올려다 본 옥상 작업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사장님과 미스 신이 있었다. 












‘왔구만! 그래 수고했네, 애 많이 썼어….저기 있는 게 다음 신관 개봉 때 걸 간판인가 보지? 초도는 왠만큼 잡아 놓은 걸 보니 아깝긴 한데….윤 화백이 없으니…쯧쯧…’ 












‘아닙니다. 저건 제가 그려놓은 겁니다. 싸부가 않 계셔도 저 그림은 제 손으로 완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자네가 그럴 수 있어?’ 












‘네, 지켜 보십시오. 싸부님이 보셨더라도 깜짝 놀랄 만큼 멋들어지게 그려 보일 테니 말입니다.’ 












‘그래?’ 












사장이 그래도 못 미덥다는 눈치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 옥상을 내려가는데도 미스 신은 내려갈 생각이 없는지 야전 침대에 걸터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누나, 나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왜 경찰한테도 말 않했어? 싸부가 그 날, 어디를 갔다 온거유?’ 












‘지금 말해서 뭘 하겠니?…..’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보니 우는 모양이다. 












‘….내가 감히 쳐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아름답기는 뭐가 아름다워, 이제 죽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맨날 술이나 쳐먹고…’ 












‘그렇게 말하지마.’ 












나는 분하고 섭섭한 생각에 사두었던 소주를 안주도 없이 병채 들이켰다. 미스 신은 주문을 읊듯이 싸부의 지나온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풀어 놓기 시작하고, 병을 손에 쥔 내 손은 점차 떨리고 있었다. 미스 신은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그 지갑을 나에게 주었다. 그 지갑에는 주민등록증, 영수증 쪼가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지갑은 겉으로 보기에 부피가 두꺼웠다. 지갑의 안 쪽에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안쪽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편지지 같은 것이 있었고, 그 편지지와 함께 사진 한장이 곱게 싸여 있었고….나는 사진을 살펴 보았다. 쭈글쭈글하고 잔주름이 많이도 가 있는 그 사진은 오랜 시간 동안 싸부의 지갑 안에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사진에는 싸부의 학생 시절이 담겨 있었다. 조각상들이 둘러서 있는 미술실 같은 방안에 이젤을 옆으로 두고 싸부의 무릎 위에 예쁜 여학생이 올라 탄 채 찍은 사진 이었다. 싸부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안고있던 그 여학생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여학생은 자신의 미모를 뽐내기라도 하듯이 렌즈를 향해 승리의 V자를 지어 보이며, 웃고 있었다. 싸부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미스 신이 말했다. 












‘그 여학생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질 않니?’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진 속의 그 여인은 바로 그 유명한 유리라는 여배우였다. 어째서 그 여자가 싸부와 같이 사진을? 


















‘자기야, 걱정하지마, 그 사람들이 자기의 천재성을 몰라줄 뿐이지,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어? 다음 번에 또 내면 틀림없이 될거야.’ 












‘유리야 미안해, 내가 능력이 없나봐.’ 












싸부는 미대를 졸업하고 국전에 두 번씩 떨어지고,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응용미술이나 산업미술을 전공한 동료들은 디자인 회사네, 기업체 홍보실이네 하며, 덜컥 취직이 되어 다니고 있었지만 순수 서양화를 전공했던 싸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저, 국전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만이 유일한 삶의 돌파구 였기에… 그러나, 생활고는 싸부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극장의 간판 그리는 일이었다. 맨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국전에 당선 될 때까지만 해보자는 심정에서 시작했고, 그나마 싸부가 일을 시작한 곳은 시내에서도 내노라 하는 일류 극장 이었기에 그런대로 밥벌이는 되었다. 어디 잘 곳도, 작업실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숙식에 작업실까지 생긴 싸부 에게는 더 없는 직장이었다. 유리라는 여자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작업실로 찾아 들었고, 영화도 공짜로, 그것도 사람들이 다 가버린 한밤중에 그 넓은 극장 안에서 둘만이 오붓하게 앉아서 보는 맛은 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기에…. 












‘헉헉, 정호씨 내 젖쫌 빨아줘.’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둘이서 영화를 보다 객석의 의자에서 키스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의 적막을 깬 것은 유리의 신음이었다. 블라우스를 벗고 겉으로만 조심스럽게 만져대는 싸부의 손길이 답답했던지 유리는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훌렁 벗어내고 그 커다란 유방을 옆 자리의 싸부 에게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으니 정말 좋다, 더,더,더 더 쎄게 빨아봐.’ 












유리는 흥분하고 있었다. 언제나 샌님처럼 조심성이 많은 싸부의 손길을 마구 잡아당기면서 유리는 그 특유의 발랄함으로 싸부의 시선을 온통 흐트러 뜨리면서 젖을 흔들어 대고…이제는 제 스스로 팬티를 내리더니 옆 자리의 싸부에게 다가가며 일어선다. 화면이 가리워지고 유리의 거뭇한 보지털이 하나 가득 싸부의 눈 앞을 어지럽히는 와중에, 싸부는 뜨겁게 달구어진 유리의 그 풍만한 엉덩이를 감싸 안으면서 보지털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하고만 있을꺼야?’ 












‘그럼 어떻게….’ 












‘내가 벗겨줄게.’ 












유리는 과감한 손놀림으로 앞 의자 와의 좁은 간격도 마다 않고 싸부의 청바지를 기어이 벗겨낸다.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완전히 부라보 콘이네.’ 












유리는 겁도 없이 씻지도 않은 싸부의 좇을 마구 쓰다듬으면서 빨아댔다. 그러나, 그것은 빠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자신의 보지에 집어 넣기 위한 침 칠하기에 불과했다. 어쩔 사이도 없이, 유리는 의자에 허리를 쑤욱 빼고 누워 있듯이 앉아있는 싸부의 좇 위로 몸을 실었다. 












‘아! 응……응……응…..정호씨 너무 좋다. 이렇게 극장 안에서 섹스하니까…. 너무 좋다…사람들이 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아흥, 아흥……..’ 












그러나, 극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사기의 조작법을 가르쳐 주고, 극장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시고 집으로 가신 장씨 아저씨도 없는 극장 안은 허허롭게 넓었지만 둘만의 공간 이었다. 장씨 아저씨와 싸부의 인연은 그 때부터 였다. 












‘유리야, 너, 너, 왜 이렇게 잘해? 나 좇이 터질 것 같애!’ 












‘헉헉, 글쎄…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아님,…..아님……’ 












‘아님, 뭐?’ 












‘아님…헉헉헉, 내 안에 숨겨진 …..섹스의 끼가 있던가…..음음…나 보지가 이상해…..더…더…더’ 












유리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싸부의 좇을 요리하고 있었다. 그 부라보 콘 같다던 싸부의 그 좇을 다 잡아 넣고도 아프다는 표정 하나 없이, 허리를 들썩이면서 보지가 째져라 엉덩이를 흔들었다. 












‘사랑해, 유리야….억억…사랑해…영원히…..’ 












"안돼, 지금 싸면 안돼, 윽윽윽…. 난,난……. 더…… 해야 돼, 더,더,더….’ 












그러나, 싸부는 외침과 동시에 사정을 했음에도 유리는 엉덩이를 흔들면서 씹질을 그만두질 않았다. 기어이 풀죽은 좇이 유리의 그 벌떡 이는 보지 속에서 빠져 나오고야 유리의 씹질은 멈추었다. 한동안 뒤엉켜 있던 두 사람. 












‘유리야, 너 대단하다. 정말!’ 












‘몰라, 챙피하게 시리!’ 












눈을 흘기며, 옷을 입는 유리를, 싸부는 행복에 겨운 눈으로 바라다 보았고,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독특한 밀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가, 작업실에 있던 싸부에게 그녀가 찾아왔다. 그것도 의외의 시간에….. 












‘어? 유리가 왠 일이냐?’ 












‘……’ 












‘왜 무슨 일 있었니?’ 












‘정호씨, 나 어제 선 봤다.’ 












‘…… 그런데?’ 












싸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 볼 사람이랑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는 얘기했는데….’ 












‘얘기했는데 뭐? 빨리 얘기해 봐, 답답하구만?’ 












‘그 사람이 나에게 영화 한번 해 볼 생각 없느냐고 해서….’ 












‘영화? 무슨 영화? 너 배우 시켜준대?’ 












‘자기가 보니까 내 마스크가 카메라발 받기 좋다나 뭐라나? 그래서 선 본건 없던 걸로 하고, 카메라 테스트나 한번 받으러 오라고 하길래…’ 












‘하길래?’ 












‘그래서 승낙했어. 밑쪄야 본전 이잖아?’ 












본전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 당시 부상하고 있는 프로덕션의 부사장 이었고, 그 길로 유리라는 여자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관객들은 그 화사한 모습에 주연 배우 보다도 말이 더 많이 돌아 버렸다. 승승장구, 그녀의 인기는 하늘이 시기할 정도로 높아만 갔고, 그때부터 싸부의 주벽은 시작이 되었다. 이미 인기 배우로 등극한지 오래고, 연락은 커녕, 개봉 당일, 무대에 올라서 사례인사를 하던 때에도, 혹시 누가 알고 있는 사이를 눈치라도 챌까, 무시하면서 황급히 앞을 지나쳐 버리기까지 한 그녀의 유명세에 눌려 싸부의 피폐함은 극도에 달해 만 갔다. 급기야, 폭음과 주벽으로 인해 극장에서의 일자리 마져도 뺏기고, 들어 앉은 곳이 바로 이 극장이었다. 미스 신은 싸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겨 줄곧 따라 다녔지만, 이런 얘기들을 해주면서 세월이 얼마가 흐른다 할지라도, 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모른다고 외면할 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기 어렵다면서 끝끝내 미스 신의 구애를 거절한 것이었다. 












‘누나, 그런데, 그날 싸부는 어디를 갔다 온 거에요?’ 












‘유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왜요? 소 닭 보듯이 했다면서요?’ 












‘이 극장을 인수한 사람이 바로 유리 씨의 남편이거든.’ 












‘멍청한 싸부!’ 












마지막 간판을 걸고 싶었다던 그 얘기는 바로 유리씨를 통해 싸부가 받아낸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또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편지 안에 있었다. 












‘유리, 






아니, 이제는 이름조차도 불러서는 안 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사람. 






그 동안 내가 간직했던 단 한장의 사진 마저도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이제 그 기억 마저도 돌려 드려야 할까 봅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도 이제 당신을 모릅니다. 






그 밤, 극장 한구섞의 객석 두 자리만은 기억할까요? 






행복하시기를 구지 기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건강하십시오. 






그래서 오래도록 당신의 남편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기억하시길….. 












잊혀진 사람, 






윤정호 올림…….’ 












싸부는 사진도 돌려주질 못하고 돌아왔었고, 그 동안 그녀에게 전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모종의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극장을 인수하고 나서, 그녀의 곁을 영원히 떠나, 두 사람이 예전에 안면식도 없었던 사람들 처럼, 인연을 끊고, 멀리 떠나주기를 강요해 왔었던 듯 싶다. 나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그런대로 살아가야만 했다. 싸부의 죽음이, 나날의 바쁜 일과와 극장 개보수 공사로 바쁜 틈에 잊혀질 즈음, 나는 4주간에 걸쳐 문밖 출입도 않고서 내내 간판을 그렸다. 어차피 마지막 이었지만, 나는 싸부의 심정으로, 분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아리따운 모습의 그 유리라는 여자를 청초하게 간판에 되살려 놓았다. 내일은 개봉 예정일 이었고, 극장은 간판만을 빼고는 초 현대식 시설로 기가 막힌 탈바꿈이 되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한밤중에 써치라이트를 켜 놓고 내일의 개봉을 위해서 간판을 용역회사 인부들과 올리고 있었다. 












‘화, 이제는 윤 화백 뺨치게 잘 그리네, 죽은 윤 화백이 이 걸 보면 월매나 좋아할꼬?’ 












두 사람 사이의 얘기를 알고 있는 장씨 아저씨께서 올라가는 간판을 보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신다. 저 위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래로 소리친다. 












‘여기 아직 페인트가 안 말랐는데요?--’ 












‘괜찮습니다. 곧 마를 거에요. 조심하세요. 내일 개봉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요.--’ 












‘내일 아침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기상대에서 그러던데 괜찮겠습니까?--’ 












‘네, 걱정 없을 겁니다. 작업이나 계속해 주세요.--’ 












나는 위로 소리를 치며, 작업을 독려했다. 어차피 내일의 개봉을 위해 촉박한 시간 이었지만 간판을 올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흐려오던 하늘은 거의 검정색을 띄기 시작하더니, 극장 앞에서 신관개관 테잎을 끊기 위해서 배우들과 유리씨 부부 내외, 전 사장님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거지반 모였을 무렵, 나는 길 건너편에서 극장을 바라다 보며, 미련 없이 싸든 짐을 어깨에 매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그 프로덕션 사장의 개관 축하 연설이 한창일 즈음, 하늘 에서는 천둥, 번개와 함께 무지막지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물줄기를 온 사방으로 퍼붓는 형상 이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우산을 쓰고 극장 안으로 비를 피하는 도중에 누군가 소리쳤다. 












‘이런, 이런……간판이 지워지고 있다!, 어서 와봐! 간판이 지워지고 있어!’ 












유리 씨와 주인공 남자 배우의 모습이 그려져 있던 간판은 빗줄기에 형체가 씻겨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극장 앞 광장은 씻겨져 내려간 물감들로 총 천연색을 수놓았고, 그 그림이 다 씻겨져 내려갔다고 여겨질 즈음에, 내 입가에는 웃음이 감돌았다. 길 건너편 간판에 씻기워진 그림은 내가 간판의 밑에 진짜 페인트로 그린 그림 위에 덧칠 해 놓은 수성 물감이었다. 씻기워진 그림이 벗겨지고 나서,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가 났지만, 사람들은 극장으로 들어가질 않고 있었다. 간판에는 유리와 싸부가 열렬히 키스를 하는 장면과 싸부가 남기고 간 그 사진의 행복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교묘히 교차되어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기에…. 그 옆에는 싸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편지의 내용이 영화의 한 대사 처럼 적혀져 있었다. 












‘유리, 






아니, 이제는 이름조차도 불러서는 안 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사람. 






그 동안 내가 간직했던 






단 한장의 사진 마저도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이제 그 기억 마저도 






돌려 드려야 할까 봅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도 이제 당신을 모릅니다. 






그 밤, 극장 한구섞의 객석 두 자리만은 기억할까요? 






행복하시기를 구지 기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건강하십시오. 






그래서 오래도록 당신의 남편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기억하시길….. 












잊혀진 사람, 






윤정호 올림…….’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싸부, 보고 계시죠? 닭발이 그린 것 치곤 꽤 그럴싸 하지 않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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